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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예순을 넘기면, 중양절의 의미가 더욱 깊어진다. 그날 나는 옛길을 다시 찾아 강시성 난창의 간장(赣江) 강가에 서 있었다. 하늘로 솟은 등왕각(滕王阁) — 비익조처럼 날아오르는 처마와 휘어진 지붕, 천 년의 세월을 견디며 여전히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이 누각이 처음 세워졌을 때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왕발(王勃)이 한 편의 글을 남긴 순간, 그 이름은 역사에 새겨졌다. 바로 ‘등홍부등왕각서(登洪府滕王阁序)’ — 당대 문학의 절정이라 불리는 그 명문이다.
🏯 천년의 누각, 문학의 빛
등왕각은 당나라 영휘 4년(653년), 당 태종의 동생 이원영(李元婴)이 홍주(지금의 난창)에 부임하며 세웠다. 이후 황학루(黄鹤楼), 악양루(岳阳楼)와 함께 중국 3대 명루(名楼)로 꼽히며 29차례나 재건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재건은 상원 2년(675년). 홍주 도독 염공(阎公)이 누각을 새로 짓자, 젊은 문인 왕발이 그 자리에서 시문을 지어 올렸다. 그의 글은 한 편의 교향곡처럼 문장이 흘렀고,
“저녁놀과 외로운 기러기 함께 날고, 가을 물과 하늘은 한 빛이로다.”
이 구절로 그는 영원을 얻었다.
🖋️ 왕발의 혼 — 그 짧고 찬란한 순간
내가 본 왕발은 언제나 빛나는 청년의 모습이다. 속세를 비웃듯 자유롭고, 문장은 폭발하듯 솟았다. 그는 아버지를 찾아 남쪽으로 가던 중, 우연히 중양절에 이곳을 방문했다.
그날 연회에서는 문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글을 썼다. 이미 글을 쓸 사람은 내정되어 있었지만, 왕발은 그것도 모른 채 조용히 붓을 들었다. 강가의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스치고, 햇살이 누각 안으로 흘러들었다. 그는 묵을 갈고 붓을 들어 강물처럼 흐르는 문장을 써 내려갔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고, 그가 마지막 문장을 쓰는 순간, 염공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이건 천재의 글이다! 영원히 남을 것이다!”
🏞️ 누각의 구조와 전설
기록에 따르면, 역사상 ‘등왕각’이라 불린 곳은 세 군데다. 산둥성 텅저우(滕州), 쓰촨성 랑중(阆中), 그리고 지금의 난창 등왕각이다. 이 중 난창의 누각이 가장 유명하며, 외관은 3층이지만 내부는 ‘명3암7’이라 불리는 7층 구조로 되어 있다. 하부에는 인공호수가 있어 북쪽 호수 위로 ‘구곡풍우교(九曲风雨桥)’가 놓여 있다.
📜 문인들의 무대가 되다
등왕각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중국 문학의 무대이자 상징이었다. 당나라의 한유가 ‘신수등왕각기(新修滕王阁记)’를 남겼고, 명대의 탕헌조(汤显祖)는 이곳에서 ‘모란정(牡丹亭)’을 공연했다. 또한 소동파(苏东坡)는 자신의 글씨로 ‘등왕각’이라는 금색 현판을 남겼다.
수많은 시인 — 장구령, 백거이, 두목, 왕안석, 주희, 황정견, 신기질, 이청조, 문천상… 모두 이곳을 노래하며 자신만의 등왕각을 남겼다.
🌅 지금, 그 자리에 서서
130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누각 위에서 간강을 바라본다. 강물은 여전히 흐르고, 바람은 여전히 부드럽다. 가을 하늘 아래,
낙조·기러기·가을물·푸른 하늘
— 그 모든 글자들이 살아 움직이며 하늘을 가른다.
왕발은 바다에서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쳤지만, 그의 글은 천년의 세월을 넘어 여전히 사람들의 입에 남아 있다. 그의 삶은 짧았으나, 그 문장은 등왕각처럼 ‘무너지되 다시 서는 힘’을 지녔다.
🌇 저녁의 불빛 속에서
누각을 나서자, 저녁 바람에 시장의 연기가 흩날린다. 나는 강가를 따라 걷는다. 오늘 본 풍경이, 천 년 전 왕발이 보았던 하늘과 같을까. 그가 붓을 들어 썼던 그 마음을, 오늘의 나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양절의 ‘등고(登高)’는 단순히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 아니다. 그건 시간을 거슬러 역사를 마주하는 일, 그리고 그 속에서 내일을 살아갈 힘을 찾는 일이다.
어떤 풍경은 세월이 흘러도 빛을 잃지 않는다. 어떤 글은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울림을 준다. 매해 가을, 누군가 다시 등왕각에 올라 왕발의 문장을 떠올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일 것이다.